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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기묘사화

제주농부 2017. 9. 3. 21:15

조광조와 기묘사화

개혁주의자
조광조- 도학정치, 기묘사화, 광인, 화태......그까닭은 개혁이란 이미지 때문일 것. 역사상의 개혁 정치가를 꼽을 때 첫손에 꼽히는 인물.
조광조의 생애
1482년(성종 13)에 태어나 1519년(중종 14)에 죽었다.
기묘사화 때문에 서른 여덟 살이라는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당대 사림의 중심이었고 이후 우리나라 성리학 도통의 정점을 점하는 인물이 되었다.
*17세때 김광필을 만나 성리학를 배우다.(김광필은 점재필, 김종직의 수제자)
*소과에 합격, 성균관에서 수학, 그곳 유생들의 추천으로 1515년 종6품 관직인 조지서 사지에 임명.(성균관 시절부터 사림의 중심인물로 부각)
*대과에 합격, 성균관의 전적에 임명.
*사간원의 정언이 되어 국왕을 만날 기회를 가지고, 고속성진을 거듭, 사헌부 대사헌의 지휘까지 올랐다.
훈구와 사림의 대림
당시 정세: 사림- 성종대에 김종직을 필두로 중앙정계에 진출했지만 무오사화, 갑자사화로 기세가 상당 꺽였고 중종반정 이후, 조광조를 선두에 두고 강력한 개혁세력으로 중앙 정계에 포진 시작.
훈구- 중정반정의 핵심 공신들이 죽거나 쫓겨난 상태라 세력이 강하지 못했다.(사림에게 유리한 조건): 주종 자신이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훈구의 견제 세력으로 사림을 이용.
김종직을 떠받힌 세력- 영남 세력
조광조를 앞세운 세력- 기호 사림
*당시 사림은 이런 호조건으로 성리학적 이상정치인 도학정치를 실현하려는 꿈을 꾸게 되었다. - 순수 이상정치는 아니었고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는 목적도 있었다. 하지만 훈구보다 사림이 건전했고 거기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도학정치의 시행
도학 : 이치를 궁구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며 도에 의해서 나가고 물러서는 것을 밝히는 학문.(의리와 명분의 실천을 강조)
도학정치 : 도학을 정치와 교화의 근거로 삼아 성리학적 이상인 왕도를 실현하는 정치.(유교적 이상정치의 구현)
*이런 정치의 시행을 위해 임금 스스로가 철인이 될 것을 요구,훈구의 특권과 비리를 집중적으로 비판, 공격하여 유교 본래의 관료체제를 확립하려고 했다.
*사회모순의 근본 원인을 지배층의 사치와 방탕에 있다고 보고 풍속 교화에 큰 힘을 기울였다. - [주자가례]시행, 소학실천운동, 향약보급운동,소격서 폐지,현량과 실시
사림의 일련 개혁은 사회모순을 직접 치료라기보다 여건을 마련하는 데 주안점을 두는 그런 개혁.(사림들의 사회적, 정치적 영향을 높이는 일)
[소학]의 실천과 향약보급운동
[소학] : 주자의 뜻에 따라 유자징이 쓴 책.
        우리나라에는 고려 말에 성리학과 함께 도입되어 유교 수양의 한방법으로 주목됐다. 15세기까지는 커게 비중을 두지 않았지만 16세기에 들어오면서 사림에 의해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단계로 넘어 갔다. 조광조의 스승인 김광필은 스스로를 ‘소학동자’라 칭하고 일생을 [소학]의 실천에 힘썼다.
중종대에는 기호사림들이 교화의 방법으로[소학]을 간행, 보급는 운동을 벌려 나갔다. 제목대로 아이들이 배우는 학문이라 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모든 사람들이 평상생활에서 지켜야 할 예법을 적어 놓은 책이고 이것을 보급, 실천한다는 것은 성리학적 인간형을 만드는 교육을 실천하자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중종대 사림들은 소학과 더불어 향약을 보급하는데도 노력했다. -
성종대에 영남사림들이 자신의 기반을 위하여 향촌사회에 유향소복립운동을 벌여 유향소를 설치 하였으나 훈구세력이 장악하자 유향소를 폐지하고 대신 향약을 시행하려고 했다.
*1517년(중종 12)에 향약실시가 받아 들여져 [주자증손여씨향약]이 시행, 이 속에는 [소학]안에 한 내용으로 들어 힜기 때문에 향약보급운동은 [소학]실천운동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향약은 충청, 경상, 전라도 등 삼남지방 가운데 사림세력이 우세한 곳에서 먼저 보급되었고 팔도의 관찰사에게 왕명이 내려졌으며 1519년에는 한성부에서도 시행되었다.
*사림들은 [소학]의 실천과 향약보급운동을 통하여 성리학적 향촌질서를 수립하면서 세력기반을 확대해 나갔다.
기묘사화의 발생
*향촌에서 기반을 잡은 사림들은, 이들을 통해 공신을 견제하려는 중종의 의도에 힘입어 어느 정도 중앙에 진출하였지만 천거제의 한계로 청요직에 임명이 어려워 세력 확대에 한계가 있었다.
*조광조 일파는 천거제의개편으로 1519년 별시 형태로 현량과를 시행하였다. 현량과 실시로 청요직에 나아 갈수 있는 길이 생겨 사림은 권력 핵심에 더 접근 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하여 개혁 기반 단계를 마련한 것에 벗어나 훈구에게 직접 타격을 가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 그중 하나가 위훈삭제파동 -중종반정 때 76명의 거짓 공신들을 지울 것을 주장.
*왕조사회의 공신은 왕과 백성이 같이 생각하는 왕조의 기둥이었다. 이 문제에 부딪힌 중종은 자신을 부정하는 듯한 사림의 세력에 견제의 필요성을 느끼고 태도가 달라졌다. - 기묘사화
*후대 이이 율곡은 [석담일기]에서 조광조를 ‘학문이 이루어 지기전에 이론을 실천하려다 구세력의 비방에 자신과 나라를 어지럽게 한 인물’로 평가했다.
*개혁은 구호와 내용이 같지 않으면 오히려 역사의 발전을 더디게 할수 있다. 하지만 개혁을 두려워 해서는 안된다.


               
               사화와 당쟁
정치란 무엇인가
정치: 국민의 의사를 반영하면서 사회 구성원 사이의 이해관계를 조절하는 행위.
*구성원사이의 갈등은 없을 수 없기 때문에 정치 행위는 영원히 존재한다. 우리는 어디나 있을 수 있는 정치 갈등에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데 정치 갈등 자체를 부정 할 수는 없다.(발전적 논의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정치 갈등의 원인, 그것을 해결하는 조정행위:정치라는 행위.
*부정의 대상이 되는 정치 행위: 정치 갈등이 사적인 이해나 감정에서 비롯되었거나 해결을 폭력적, 강압적 방법으로 하는 것.
*정치 갈등을 민주적 방법으로 해결 한다면 바람직한 행위라 할 수 있고, 다양한 정파와 정치적 견해들이 존재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필요도 있으며,  서로의 차이를 어떻게 조정, 통합해 나아가는가에 판단의 기준을 두면 될 것이다.
그러면 사화는...
*조선사회의 정치 - 사화=당쟁 : 정치=부정의 대상 - 일제 식민사학자들에의한 오염된 생각.
*부정의 역사인식이 하나가 당파성론 - 1907년 히데하라가 [조선정쟁지]란 책을 쓰면서 제일 먼저 주장(사화와 당쟁이 당파성론의 구체적 근거) - 최근 15, 16세기에 대해 여러 측면의 연구가 이루어져 잘못된 인식은 서서히 극복되고 있다.
*사화가 일어났던 시기는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중반까지 : 1.농업기술의 발달, 관계기술 보급, 간척지 개발...{농업 생산력이 크게 향상} 2. 상업 발전(전국에 정기 시장인 농촌 장시가 생김)
3. 수공업 발전(면포의 생산력 향상)  4. 국내 유통의 원활로 국제무역도 크게 향상.           
*경제 발전은 새로운 정치세력을 낳았다.(농업생산력을 중심으로 경제발전을 추동한 재지사족들이 사림이란 정치 세력을 이루어 자신들의 몫을 지키려 정치를 시작했다. - 훈구와 대립)
*이러한 배경을 가진 주도권 대립이 극단적 사건으로 불거나온 것이 사화. :훈신, 외척, 척신들이 권력을 자신의 치부를 위해 남용한다고 신랄하게 비판하다가 정치적 탄압을 받은 것.(사림의 패배)
*사화는 하나의 정치 현상. 개인과의 감정적 갈등이 아니라 사회경제적인 발전 과정에서 마땅히 있을 수 있는 정치 현상.
무 .갑 .기 .을
*무오사화 : 1498년(연산군 4).영남 사림의 대표격인 김종직이 사관으로 있으때 쓴 [조의제문]이란 글이 빌미.그 바탕에는 정치적갈등이 내재 - 유향소복립운동을 추진할 정도로 성장한 사림이 훈구의 사적이익추구와 비리를 맹렬히 비난하자 반격을 한 것.
*갑자사화 : 1504년(연산군 19).연산군과 그의 친위 세력이 사치생활의 재원으로 훈구세력의 재산을 탈취하기 위한 사건, 직접적인 원인은 연산군의 생모 윤씨가 폐비하여 사사된 사건을 연산군이 알게 된데 있다. 당시 대신들의 묵인을 이유로 죽이거나 부관참시까지 하였고 사림들 가운데도 연루된 자가 많아 사화라 한다.
*기묘사화 : 1519년(중종 14).가장 전형적인 사화. 기호 사림들이 조광조를 중심으로 개혁을 추진하다가 훈구 세력의 반발을 받아 일어났다. 사림은 현량과를 통해 자파 세력을 확대, [소학]의 실천과 향약보급운동을 통해 향촌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했고, 위훈삭제까지 시도해서 공신세력의 근본 세력을 제거하려다 중종의 태도변화, 훈구의 반격으로 실패.
*을사사화 : 1545년(명종 즉위년). 외척간의 싸움에서 사림이 피해를 당했던 경우. 인종의 외할아버지인 윤임을 중심으로 한 대윤과
명종의 외삼촌인 윤원형을 중심으로한 소윤이 대립하였는데 명종의즉위로 소윤이 대윤을 축출하였다. 사림은 기묘 사화후, 중종 말년부터 중앙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했고 인종도 이들을 지지하였으나 인종의 죽음이후 소윤이 대윤을 몰아 낼때,대윤의 비호를 받은 그들도 묻혀 많은 희생을 당했다.
*사림은 ‘사화’라는 대립에서는 모두 당했지만 궁극적인 승리는 그들의 차지였다. 시련의 와중에서 명분을 축적하고 기반을 다져 선조대에 가면 자연스럽게 정권을 장악.
동서붕당과 당쟁
*당쟁 : 사림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다음에 나타나는 정치 현상.
       사림내부의 갈등. (정치 운영상의 차이가 갈등을 빚어내는          요인)
*당재의 첫 단추 : 동서붕당.  1517년(선조 8) 서인과 동인의 분열에서 비롯. 문신들을 임명하는 인사권을 담당한 이조전랑진을 두고 심의견과 김효원의 대립으로 표면화 되었다. 김효원을동조한 후배사류들을 동인, 심의겸과 그에 동조한 선배사류들을 서인이라고 불렀다.
*이들의 대립은 단순히 권력을 둘러싼 것만이 아니었다. 사림들은 명종대부터 학문적 내용에 따라 학파를 형성하였고 이 학파의분기를 바탕으로 선조대에 정계에 진출, 이이와 성흔학파가 주로 서인을, 서경덕 .조식과 이황학파가 동인을 구성하였다.
*동서분당은 학파들의 학문적 차이가 정치적 분화로 가면서 거쳐야 했던 하나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붕당 정치론
*조선왕조가 유지되던 19세기 말, 우리나라 학자들 중에서도 정치를 비판하는 인식이 있었다. - 정치 자체의 부정이 아닌 한계에 이른 양반정치를 청산하고 새로운 정치질서를 세워보고자 하는 의도.
일제 식민사학자들 - 우리 민족의 정치적 역량을 부정, 식민통치의 합리화를 위해 고의로 ‘조선의 정치=당쟁’ 이라는 부정적 시각으로 조선정치사를 짜나아 갔다.

출처 : 반서울
글쓴이 : 벽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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