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南人)과 노론(老論)의 대립
1.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이황과 기대승 사이의 사단칠정론은 넓게 보자면 이황의 영남학파와 이이의 기호학파의 대립으로 인하여 마침내는 동인과 서인(노론)사이에 벌어진 당쟁이 이론적인 근거가 되기이 이른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논쟁의 발단은 정지운의 《천명도(天命道)》를 이황이 수정하면서 비롯 되었는데, 정지운이 “사단은 理에서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氣)에서 발한 것이다(四端發於理, 七情發於氣)”라고 작성했던 부분을 퇴계가 “사단은 理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氣가 발한 것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로 고치게 되면서 이와 같은 사실이 학자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기대승이 이에 대해 반박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기대승은 이기일원론적인 견해에 바탕을 두고 사단과 칠정을 설명함으로써 사단과 칠정을 명확하게 이와 기에 분속하는 것을 반대하며, 이와 기는 관념적으로는 구분할 수 있으나 구체적인 마음의 작용에서는 구분할 수 없다고 주장을 하게 되어 사단칠정논쟁의 서막을 올리게 되었다.
퇴계(退溪)는 사단은 순선무악(純善無惡)한 것이므로 욕구와 성질이 다른 반면, 칠정은 유선유악(有善有惡)이므로 절제되지 않으며 악으로 흐르게 되는 욕구로 본 것이다. 순선무악(純善無惡)한 사단은 절제의 필요성이 없고 유선유악(有善有惡)한 칠정은 절제를 필요로 한다. 즉, 퇴계에 의하면 완전무결한 본연지성이 그대로 발현되는 사단은 ‘완전한 것’이고 형기에 가려져 선이 보장되지 않는 칠정은 ‘불완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완전한 사단과 불완전한 칠정이 동일한 발생 내원을 가진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고, 그 때문에 각각을 理와 氣에 분속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고봉과 퇴계의 사단칠정론은 율곡의 퇴계의 설을 부정하면서 가속화되었다. 율곡은 리와 기는 서로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리와 기의 성질을 구분하여, 리는 무형무위(無形無爲)한 존재로서의 기의 주재자(主宰者)이고, 기는 유형유위(有形有爲)한 존재로서 리의 기재(器材)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리통(理通)과 기국(氣局)을 주장하고 기발(氣發)과 이승(理乘)을 주장하면서, 퇴계의 이발설(理發說)을 부정하였다. 또 이기(理氣)가 불난(不離), 불잡(不雜)의 관계에 있다고 보아 이기(理氣)의 일물설(一物說), 이물설(二物說), 선물설(先物說) 등을 모두 부정하였다.
또 퇴계가, 사단을 理의 發, 칠정을 氣의 發이라 하여 이원적(二元的)으로 본데 반해서, 율곡은 칠정은 사단을 포괄하고 있고 모두 다 氣의 發이라는 일원론(一元論)을 주장하면서, 퇴계의 설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까닭으로 퇴계를 종주(宗主)로 삼는 남인들은 율곡을 좋게 보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율곡은, 남인들이 퇴계와 병칭하여 추앙(推仰)하는 회재 이언적을 비난하기도 하였다. 뒤이어 율곡의 학통을 계승한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은 퇴계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부정하여 이기(理氣)는 둘이 아니고 하나이고, 理가 氣를 타기는 하지만 氣는 理를 따르지 않는다고 하여 율곡의 설을 지지하였다. 이에 대해 유성룡의 제자로 퇴계학파를 계승한 우복 정경세는, 김장생의 이기론에 반론을 제거한다. 이기(異氣)는 본래 하나가 아니고 둘이라는 사실을, 朱子의 說을 끌어와 변론(辯論)하게 되고 양 학파의 학문적 대립은 본격화된다.
사계 김장생은 퇴계의 학문적 권위를 격하하는 한편, 율곡에 대해서는 주자(朱子)의 남전(婻傳)이라 하여 극도로 推, 宗 하였다. 퇴계를 극도로 추앙하는 남인들에게 김장생의 퇴계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유성룡의 행적에 대한 비난까지 더해지면서, 퇴계확파와 율곡학파와의 학문적 갈등은 더욱 심각해져, 동인의 서인 전체에 대한 반감을 야기시키게 되었고, 이는 동, 서 당쟁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2. 문묘종사(文廟宗社) 문제
무력을 동원하여 반정을 성공함으로서 집권한 서인들은 대부분 율곡과 우계의 문인(門人)들이었다. 기호학파의 시조인 율곡과 우계를 문묘(文廟)에 종사(從祀) 함으로써 그 학문적 정통성을 이정받아 정계에서 그들의 입지를 확고히 하려고 하였다. 조선은 특히 유학을 관학으로 삼았으므로 문묘종사(文廟宗社) 여부(與否)가 당사자나 그 학파의 학문적 권위를 좌우하였다. 그래서 율곡과 우계의 문묘종사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서인들은 지속적이며 적극적인 노력을 하게 된다.
정계에서 세력이 부족하던 남인들은 학문상으로 우월하다는 자긍심을 갖고 있었으므로 율곡과 우계의 문묘종사를 결사적으로 반대하여, 이 문제를 두고 서인과 지속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서인들도 처음에는 율곡과 우계를 퇴계와 같은 반열에 올려 놓으려고 했지만, 남인과의 대립과정에서 사이가 점점 멀어짐에 따라, 율곡을 퇴계보다 높여 주자(朱子)의 학통에 바로 접맥시키려는 경향이 강해져 갔다.
17세기 남인의 중심인물인 미수 허목(眉售 許穆)의 율곡, 우계에 대한 비판에서 문묘종사에 대한 남인들의 기본적인 시각을 엿볼 수 있다. 허목은 그의 학문편(學問篇)에서, 율곡의 학문은 유교의 학문 순서를 모르는 불교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보면서, 율곡의 학문방법상의 결점을 들어 유학의 학문을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율곡을 유학자로 보지 않고 불교로 위장한 승려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율곡과 종유(從遊)하던 사람들도 모두 이름을 좋아하고 이익을 탐내는 사람으로 보았으며, 또 율곡이 선조의 신임을 얻어 국사를 오로지 했으면서도 한 시대의 업을 업신여기면서 변경하기만을 좋아하여 나라를 어지럽히고 당쟁을 야기시켰다고 혹평(酷評)을 가하였다.
허목은 그의 학문편에서 우계 성혼에 대해서도 그 결점을 지적하였다. 을축옥사(乙丑獄死)때 최영경의 옥사에 우계가 관계되었고, 임진왜란 때 선조의 차가(車駕)가 집 앞을 지나가는데도 나와 보지 않았으니 임금 섬기는 禮를 잃어 버렸다는 것이다.
남인의 중심인물인 허목의 견해가 이러했으니, 남인들이 율곡, 우계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갖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고, 이런 바탕에서 문묘종사(文廟從祀)의 반대운동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인조(仁祖)대부터 시작된 우율종사논쟁은 점향(點享)과 복향(復享)을 거듭하여 숙종 27년을 끝으로 남인이 다시 집권하지 못하면서 문묘종사에 대한 시비는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김장생을 비롯해서 송시열, 송준길 등 서인계 인물들의 문묘종사가 계속되었지만 서인 노론 집권기였으므로 문묘종사에 대한 잡론(雜論)은 사라졌다. 대신 이때부터는 문묘종사의 객관적 공정성이 많이 상실되어, 문묘종사의 가치가 하락하였으며, 남인들은 공정하지 못한 문묘종사의 의미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조소(嘲笑)의 대상으로 삼기까지 하는 경향이 많았다.
3. 예송논쟁(禮訟論爭)
예송논쟁은 조선 현종 때 궁중의례의 적용문제, 특히 복상(服喪)기간을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크게 논란이 벌어진 두 차례의 논쟁이다. 당시 남, 서인을 막론하고 예학을 중시하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학풍에 따라 그 경향을 달리하였다. 남인측의 학문적 근거는 육경(六經)에 있었던 만큼 그 예론의 뒷받침은 당연히 고례(古禮)의 근원인 《의례(儀禮)》였다. 허목이 지은 예서(禮書)인 《경예유찬(經禮類纂)》은 철저히 고례(古禮)에 근원을 두었다. 반면에 김장생에서 비롯된 서인측의 예학은 《주자가례(朱子家禮)》에 기본을 두고 있다. 그의 저서인 《가례집람(家禮輯覽)》자체가 바로 《주자가례(朱子家禮)》를 근간으로 하여 그것을 보완하는 작업으로서, 그의 예학은 주자의 예학을 충실히 계승하였다.
인조반정 이후의 서인 정권에서는, 김장생이 그들의 산림으로서 정신적인 지주의 위치에 있었으므로, 자연히 그의 예학시대(禮學時代)의 초석의 자리를 차지하고서 그 권위를 인정 받았다. 그의 아들이자 수제자인 김집에 전승되어 연구 정리된 예학이 17세기 예학 중시기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김집을 통해서 학통이 송시열에게 전승되어 계속 집권세력의 이론적 기반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해 갔다.
육경(六經)에 바탕을 둔 남인측의 예학은 집권세력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그 정당성을 인정받고자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서인들에 의해서 결정된 복제에 대해서 남인들은 그 오류를 지적하고 나선 것이다. 당시로서는 남, 서인을 막록하고 예를 치세의 근본으로 생각하여 매우 중시하였다. 그래서 자기 학파의 정통성을 확보(確保)하기 위해서 자파(自派)의 학문적 역량을 총동원하여 이론적 투쟁을 전개해 나갔던 것이다.
또한 이를 사단칠정논쟁의 연장선에서 본다면 이발(理發)을 부정하고 기발(氣發)만을 인정하여 기의 가변성만 인정하고 리의 절대불변을 주장하는 율곡학파의 서인은 종법(宗法)=천리(天理)가 왕 또는 특별한 경우에너 변할 수 있다는 왕자예불동사서(王者禮不同士庶)를 주장하였다. 이처럼 이당시 정쟁은 이념에 바탕한 이념정당의 끊임없는 정책대결이였던 것이다.
4. 성왕론(聖王論)과 성학록(聖學論)
정조는 분열된 정치를 지양하면서 국왕을 중심으로 대동단결된 정치를 추구했다. 그러한 정조가 추구한 대동의 이상정치는 ‘삼대의 정치’ 또는 ‘성왕의 정치’로 표현되곤 하였는데, 이는 그가 하(夏), 은(殷), 주(周) 삼대의 정치를 좋은 정치의 모델로 설정하고 요(堯), 순(舜)을 훌륭한 정치가의 준거로 삼았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성왕의 정치를 이상으로 삼았던 정조에게 있어서 서경(書經)은 중요한 텍스트로 간주되었다. 요(堯), 순(舜)의 정치가 기록되어 있는 서경은 정조(正租)의 대화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시험 등에서도 빈번히 출제되었기 때문이다. 사망 직전에 있었던 좌의정 심환지와의 대화에서는, 서경의 ‘오직 임금만이 극을 만든다’라는 구절을 설명하면서 임금을 ‘집의 용마루(屋極)’ 또는 하늘의 중심(北極)으로 비유하여 국왕 중심의 정치관을 보이고 있다. 즉 ‘오직 임금만이 극을 만들고’, ‘극을 세운다’라고 하며 명실상부한 정치의 주체로서 국왕의 위상을 천명하는 한편, 적극적인 정치행위자로서 성왕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성왕론은 유가(儒家)에서 이상적 정치로 일컬어지는 ‘요순의 정치’를 국왕의 입장에서 재해석한 일종의 국왕의 존재론으로서 성학의 정치 또는 ‘성학론(聖學論)’과 대조를 이루는 정치관이다. 정조의 경우 자신을 단순한 성인이 아니라, 정치의 세계를 떠날 수 없는 ‘정치가-성인’즉 성왕(聖王)으로 이해하려고 했는바, 특히 그는 삼대시절의 성왕들을 준거인물로 삼고, 국왕 중심의 강력한 개혁정치를 추진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정조의 이 같은 국왕중심의 정치관은 노론 신하들의 입장과 대조를 이룬다. 정조시대 전반기에 영의정을 지냈던 노론의 정존겸은 ‘국왕은 사대부와 마찬가지로 “뜻” 을 바로 세우는 성학(聖學)에 전념하여야 하며, 모든 정사는 현명하고 유능한 신하들에게 위임할 뿐 몸소 친히 서무를 부지런히 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라고 주장했다. 이같은 성학론의 논지는 정조시대 노론의 영수였던 김종수에게 있어서 보다 극명하게 드러난다. 김종수에 따르면 “하루에 만가지 사무를 처리하는 제왕에게 있어서 그 마음을 사물에 따라 변하지 않게 하는 것은 역시 어려운 일로서, 그 마음을 지켜 나가기 위해서는 경연(經筵)을 자주 열어 성학을 진전시켜야만 한다. 그런데 국왕이 근년이래 강연을 정지하는 날이 점점 많아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거만하게 스스로를 성인이라고 여기면서 뭇 신하들의 의견을 깔보기 때문에 서슴없이 할말을 하는 기상이 사라지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노론의 이같은 성학론에 대해 정약용 등 남인들은 성왕론의 입장에서 반박하였다. 정약용은 옛적 성왕들이 몸소 친히 서무를 부지런히 하지 않고, 현명한 사람을 임용하고 유능한 사람에게 맡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사사로움을 버리고 공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신하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며, 정조시대에는 그러한 신하를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인바, 이 때문에 국왕이 직접 서무를 챙기고 인사를 책임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정약용에 따르면 훌륭한 국왕이란 부지런하고 주밀한 정치가이다. 삼대의 지치(至治)를 이룩한 요순(堯舜)의 경우도 정밀하고 엄혹하여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공손하게 움츠리고 두려워 떨게 하여 일찍이 털끝만큼도 감히 거짓을 꾸미지 못하도록 한 강력한 정치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순(舜)임금이 팔짱끼고 말없이 앉아서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어도 천하가 순순히 되어갔다고 거짓 주장하여, 적극적으로 일을 도모하려는 왕의 의지를 꺾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정조는 정약용을 비롯한 남인계통 사대부들의 이같은 성왕론을 적극 수용하여, 개혁정치를 펼쳐나가는 바 노론과의 대립이 불가피하였던 것이다.
4. 노론(老論)과 소론(小論)
훈척들에 대한 이해 관계, 그리고 태조 존호가상 등 일련의 문제들을 둘러싸고 서인은 노론, 소론으로 점차 갈라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노론과 소론의 분당이 돌이킬 수 없게 된 데에는 송시열과 윤증 부자간의 이른바 ‘회니시비(懷尼是非)’라고 하는 오랜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시비의 발단은 윤휴를 둘러싼 갈등과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에 대한 송시열의 비판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송자대전에 송시열이 문생 박광일의 질문에 대한 답에 잘 나타나 있다.
“이미 노론, 소론의 말이 나왔으니, 무슨 일인들 발생하지 않겠느냐? 대체로 요즈음 일은 그 근원을 따지면 윤휴를 가차없이 배척한 까닭으로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처음에는 윤휴가 총명하고 민첩했으므로 내가 깊이 혹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항상 퇴계, 율곡, 우계 등 제현(諸賢)의 단점을 말하기 좋아하고 주자를 기탄없이 배척했으니, 이는 사문(斯文)의 난적(亂賊)이요 이단 중에서도 심한 자이다. 이 때문에 내가 우리 도(道)를 위해 윤휴를 배척한 것인데, 윤선거만은 극력 구호하므로 역시 내가 가차없이 나무랐다. 기해년 이후에는 그가 윤휴를 단념하고 절교했는가 여겼는데, 윤선거가 죽은 뒤에 윤휴가 제문을 지어 보내자 윤증도 거절하지 않고 그것을 받았다. 그런 뒤에야 나는 끝내 윤휴와 절교하지 않은 것을 알았다. 이 때문에 내가 그의 제문(祭文)에 그 미의(微意)”약간 표시했고 묘문(墓文)도 그렇게 했던 것인데, 이것이 윤증이 나를 원망해 이렇게 노론과 소론의 분열에까지 이르렀다. 『송자대전(宋子大全)』부록 권 16, 어록 3
그러나 그러한 대립은 결국 정치관의 차이에서 기인된 것이다. 윤증과 송시열은 16세기 이래로 변화해온 조선사회 이해에 대한 시각의 차이에서 대립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밖으로는 병자호란 이후 야기된 국제관계의 변화에 따른 숭명의리(송시열)와 대청실리외교문제(윤증)의 대립이었고, 양난 이후의 사회변동과 경제적 곤란은 주자학적 의리론과 명분론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역사적 명제를 제기시켰다. 그는 많은 문제(門弟) 중에서도 특히 정제두(鄭齊斗)와 각별한 관계를 가졌다. 두 사람 사이의 학문 사상적 교류는 『명재유고(明齊遺稿)』와 철학으로 미흡하다는 것이었고, 왕학적(王學的) 학문과 실학적(實學的) 경륜을 담은 정치철학이 내재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시국관의 차이로 인해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分黨)되었다. 동인이 일찌감치 선조 때 남인과 북인으로 분당한 것에 비하면 비교적 오랫동안 같은 당의 테두리에 있었던 셈이었으나, 이들의 분당(分黨) 역시 궁극적으로 학문과 세계관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즉 율곡과 우계의 이른바 ‘우율논변(牛栗論辯)’이라고 불리우는 ‘인심도심논쟁’에서 보이듯이 서인의 노론, 소론 분당(分黨)은 태생적 운명인 것이다.
5. 시파(時派)와 벽파(僻派)
정조대의 정치 세력은 기본적으로 노론, 소론, 남인으로 3분된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시파, 벽파로 양분되기도 했다. 그러나 5색 당파가 존재했던 것은 아니고 시파, 벽파는 각 당마다 존재할 수 있었다. 노론에도 시파, 벽파가 있고, 소론과 남인에도 있었던 것이다. 다만 각 당에 시파, 벽파가 존재한다고 해서 본래의 당색을 초월한 시파, 벽파로 결집된 것은 아니었다. 시파와 벽파를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여기에는 신임의리(辛壬義理). 임우의리(壬牛義理)에 대한 인식문제와 정조의 정국운영에 대한 동조 여부가 미묘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대체로 시파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하면서 정조의 정국 운영에 동조한 세력을 말하며, 벽파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연시하면서 정조의 정국 운영에 동조하지 않은 세력이라 할 수 있다. 즉 시파는 친 정조세력이며, 벽파는 반 정조세력이었다. 양자는 학문적으로도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즉 시파가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한 낙론 계열이라면, 벽파는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한 호론 계열이었다. 이 점에서 시파는 서울, 경기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이며, 벽파는 호서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