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당파들
●동인 조선
중기의 정파로 16세기 중엽, 선조 즉위 후 중앙 정계를 장악한
사림파들 가운데서 후배 관인들을 중심으로 성립되어 주로 선배들로
구성된 서인에 맞섰다. ●서인 조선
중기의 정파로 15세기 말 이후 중앙에 진출하여 훈구파의 심한 탄압을
이겨내고 16세기 중엽 선조 즉위 후 중앙정계를 장악한 사림파들
가운데서, 훈구정치의 인물과 체제를 급격히 청산하려는 후배
관인들인 동인에 대립한 선배 세대들을 중심으로 성립되었다. 명칭은
분파의 중심 인물이었던 심의겸의 집이 도성 안 서쪽에 있었던 데서
기인하였다.
●남인 조선
중 ·후기 동인으로부터 북인과 함께 분파된 정파로서 1588년(선조
22) 정여립의 옥사를 이용하여 동인에 타격을 가한 서인에 대해,
절충적 입장을 지킨 유성룡,김일성 등을 중심으로 성립하여,
적극적인 서인 배격을 주장한 정인홍,이발등의 북인과 맞섰다. 학맥으로
이황(李滉)의 제자와 지역적으로 경상좌도의 기반에서 성장한 사림이
중심이 되었다. 시비의 분별보다 정파간의 협동에 의한 정국의
안정에 중점을 두는 입장을 지녔으며, 임진왜란중에
서인 ·북인 세력과 공존하면서 정국을 주도해 전란 극복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과의 싸움에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입장을 취한 것이 강력한 주전론의 비판을 받아, 전란 말기에
실세하였다. ●북인 조선
중기의 정파로 16세기 후반에 성립된 동인으로부터 남인과 함께
분파되었다. 1588년(선조 22) 정여립의 옥사를 이용하여 동인을
숙청하였다가 곧 실세한 서인에 대해, 정인홍,이발등을 중심으로
한 적극적인 배격과 유성룡등의 공존의 입장이 대립하였고 이들이
각기 북인과 남인으로 분기하게 되었다. 학통상으로는 동인이
이황과 조식 및 서경덕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있던 중 이황의
제자들이 주로 남인이 된 데 비해 북인은 조식 및 서경덕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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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 소론과
함께 앞시기의 서인에서 갈라져 나왔다. 17세기 말엽 숙종 초기에
서인 내부에는 정치운영 방식, 훈신,척신등 특권세력과의 제휴,
남인에 대한 처리 등 여러 문제를 둘러싸고 입장의 차이가 나타났으며,
거기에 지도자인 송시열과 그 제자 윤증사이의 불화가 거듭되는
상황에서,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나의 정파를 이루어 남구만등을
중심으로 결집한 소론과 대립하였다. ●소론 서인
내부에서 정치적 입장의 분화는 이미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강화 여부를 둘러싼 논쟁 등에서 나타나며, 17세기
말엽 숙종 초기에 정파의 분리가 이루어졌다. 이때는 훈신·척신
등 특권세력과의 제휴, 남인에 대한 처리 방안 등에서의 이견과
지도자인 송시열과 그 제자 윤증 사이의 불화를 배경으로 남구만,박세책
등이 중심을 이루었으며, 송시열을 정점으로 한 노론과 대립하였다.
특히 경종대에는 왕위 계승문제를 직접적 정치 쟁점으로 하여,
국왕의 동생 여잉군을 후원한 노론을 반역으로 규정하여 숙청하였다.
영조가 즉위한 뒤 노론의 반격을 받아 '소론사대신'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제거되었으며, 그 중 일부가 남인과 연계하여 무력으로
봉기하다 진압되었다.
●대북 조선시대의
사색당파(四色黨派) 중의 하나. 1575년(선조 8) 양반사회는 분열이
생겨 동인(東人) ·서인(西人)으로 갈라졌고 동인은 다시
분열하여 남인(南人) ·북인(北人)으로, 북인은 다시 분파하여
1599년(선조 32) 대북(大北) · 소북(小北)으로 되었다.대북은
소북에게 눌려 선조 말기까지 세력을 펴지 못했고, 선조 말기에서
광해군 초기에 걸쳐 대북은 다시 육북(肉北) ·골북(骨北)
·중북(中北)으로 분열되었다. 대북에 속했던 사람은
이산해(李山海) ·이이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
·홍여순(洪汝諒) ·기자헌(奇自獻) 등이다. ●소북 조선시대에
북인(北人)으로부터 갈라져 나와 선조 때 세력을 떨친 당파(黨派) .원래
동인(東人)이 남·북인으로 분파(分派)한 다음 유성룡(柳成龍)의
일당인 남인이 실세(失勢)하자 정권을 잡았다. 1599년(선조
32) 홍여순(洪如諄)의 대사헌(大司憲) 임명을 둘러싸고 이에 반대한
김진국(金盡國)·남이공(南以恭)이 영수가 되어 소북을
형성하고, 대북은 이산해(李山海)· 홍여순을 영수로 하였다.
이때 소북인은 김진국·남이공 등이 관작(官爵)을 깎이는
등 밀려났으나 후에 서인(西人)을 몰아내고 일시 대북·소북이
연합정권을 세웠다. 1604년 소북의 영수 유영경(柳永慶)이 영의정에
오르면서 소북이 정권을 독점, 서인·남인은 물론 북인도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소북은 유영경파를 탁소북(濁小北)이라
하고 남이공파를 청소북(淸小北)이라 하여 갈라지더니 유영경이
이미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을 배척하고 선조가 총애한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다 실패했다.선조가 죽고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7년간 집권한 유영경의 소북 정권은 몰락하고 정인홍(鄭仁弘)
등의 대북 일당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7년간의 소북 집권에
대해 후일 최명길(崔鳴吉)은 "유영경은 7년 집권하는 동안
권리를 독차지하고 자당(自黨)의 기반을 굳혔으나, 그 때에
기강(紀綱)이 대략 잡히고 조야(朝野)도 비교적 평온하였으며
사림(士林)에 화를 끼친 죄도 없었다"고 평했다. 소북
중에서도 유영경 일파는 광해군 즉위 초에 죽음을 당하였고 나머지
몇몇은 광해군이 쫓겨나고 대북이 몰락한 인조 때 서인(西人)
정권에 끼일 수 있었다.
●시파 조선
후기 정조 때 사도세자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붕당 간의 대립 속에서
정조의 정책에 편승하는 부류라는 의미로 사용된 용어. 정조는
즉위 후 외조(外祖)인 홍봉한(洪鳳漢) 계열과 반(反)홍봉한 계열을
포함한 탕평당 세력을 일소하는 한편, 노론청류를 등용하고
규장각(奎章閣)과 초계문신(抄啓文臣)제도 등을 통해 친위세력을
키워 나감으로써 왕권의 기초를 다졌다. 정조는 왕권강화를
위해 노론청류뿐만 아니라 채제공(蔡濟恭)과 같은 남인 ·소론계
일부 등을 중용하였다. 기존의 노론 탕평당 계열은 영조 말에
이미 사도세자문제를 둘러싸고 홍봉한 계열[扶洪派]과 반홍봉한
계열[攻洪派]로 분열되어 있었다. 정조는 왕권강화의 토대를
닦은 후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고 수원을 중심으로 하여
새로운 상권을 형성시키고자 하였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임오의리(壬午義理)는 이미 공홍파와 부홍파가 분열하였던 것처럼
영조 말 이후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정조는 즉위 후 임오의리를
둘러싼 논란을 억제하면서 왕권강화를 달성한 다음, 재위 12년
이후부터 사도세자의 위상을 자신의 의향대로 설정해 나갔다.
이러한 새로운 상황에 대해 정조 주도하의 정국에 참여하였던 계열이나
그 대척에 서 있던 벌열(閥閱)세력 등의 사도세자문제를 둘러싼
대립은 보다 심화되었다. 채제공 등 소수 남인으로서는 이 문제가
노론중심의 정국운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소재였으므로
이를 본격적으로 제기하였다. 이 과정에서 사도세자문제에 대한
정조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 무리가 벽파로 결집되어, 정조의
정책에 동조하는 부류를 시류에 편승한다는 의미로 시파라 하여
배척하였다. 시파와 벽파의 대립은 정조가 사도세자문제에 관한
자신의 의중을 분명히 하면 할수록 그에 비례하여 심화되었다.
임오의리와 정조의 정책을 둘러싼 시 ·벽의 대립은 순조
초년 경주김씨와 안동김씨가 대립하게 되는 중요한 명분이 되기도
하였다. ●벽파 1762년(영조
38) 장헌세자(莊獻世子) 또는 사도세자(思悼世子)라고도 불리는
영조의 세자가 폐위(廢位) ·아사(餓死)한 사건을 중심으로
하는 당쟁에서 세자를 배척한 당파(黨派). 이 파의 주류는 노론(老論)
계열인데, 조선시대 중엽의 당쟁은 주로 노론과 남인, 노론과 소론의
대결이었다. 벽파에 대립한 당파인 시파(時派)도 또한 남인이어서
시파 ·벽파의 당쟁은 결국 남인과 노론의 대결이었다.
남인, 즉 시파는 장헌세자가 억울하게 폐위되고, 또 뒤주 속에
갇혀 참혹하게 굶어 죽었다고 생각하여 세자를 동정하였다. 그러나
노론, 즉 벽파는 세자가 광패(狂悖)하여 폐세자(廢世子)의 변을
자초하였으니 조금도 동정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세자가 만일 왕위에 오른다면 나라를 망칠 것이므로 적극적으로
배척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각 당파가 표면에
내세운 명분일 뿐 사실은 두 파가 주장하는 대로가 아니었다. 숙종
때에 몇 번이나 되풀이된 남인 대 노론의 당쟁이 경종 때를 거쳐
영조 때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것이다. 영조는 즉위 초부터 탕평책(蕩平策)을
써서 당쟁을 막으려 했지만 자신도 결국은 당쟁에 말려든 셈이다.
시파 ·벽파의 당쟁은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 ·순조
때에도 되풀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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