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은 1947년 3월을 기점으로 시작되었다. 이해 3월 1일, 제주도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주도로 개최된 ‘3.1운동 기념 대회’에 3만 명 이상의 도민이 참가해 모스크바 삼상회의안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를 선언하자 경찰은 집회의 해산을 시도했다. 남한에서 친미 성향의 정권 수립을 원했던 군정 당국으로서는 통일 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도민들의 집회가 가두시위로 발전하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기마 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이가 다치는 일이 일어났고, 이에 분노한 군중이 거칠게 항의하는 과정에서 경찰이 총기를 발사해 여섯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격분한 도민들은 경찰의 공식 사과와 발포한 경찰의 파면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 요구가 거부당하자 도민들은 공동 투쟁 위원회를 결성한 뒤, 3월 10일에 총파업에 들어갔다.
가두로 뛰쳐나온 시위대를 향해 군정청 망루에서 경찰이 발포하여 6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기업체뿐만 아니라 관공서와 학교, 심지어 경찰까지 가담하면서 파업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자 당황한 미군정은 사태 해결을 다각도로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태 해결을 위해 3월 14일 제주를 방문한 경무부장 조병옥의 강경한 자세 때문에 문제는 훨씬 더 심각해졌다. 조병옥 경무부장은 사과의 말을 전혀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청을 방문해 파업 중이던 공무원들에게 “제주도 사람들은 사상적으로 불온하기 때문에 건국에 저해가 된다면 싹 쓸어버릴 수도 있다”는 내용의 발언까지 했다. 이보다 이틀 전에는 경무부 차장 최경진이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원래 제주도는 주민의 90%가 좌익 색채를 띠고 있다”고 밝히고, 3.1사건과 이후 사태의 원인이 제주도민의 정치적 성향에 있음을 강력하게 시사했다.
미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왼쪽에서 두번째)
당시 미군정과 그 밑의 경찰 수뇌부는 모두가 제주도를 ‘빨갱이들의 섬’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인식에서 경찰은 사태를 조속히 마무리 짓기 위해 여러 도에서 차출된 300명 이상의 경찰 병력과 그 이상의 서북청년회 단원들을 제주에 증파했다. 곧이어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불어 닥쳐 제주도민 2,000명 이상이 체포되고 200명이 구속되었으며, 이로써 제주도민과 미군정은 정면 대결로 치닫게 되었다.
사태는 해가 바뀌면서 더욱더 악화되었다. 1948년에 미군정이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을 철회하고, 유엔의 주관하에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수립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전국에서 단독 선거에 반대하는 투쟁이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제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결과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섬 전체를 휩쓸었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몇 차례의 고문 치사 사건은 미군정과 경찰, 그리고 서북청년단을 비롯한 우익 단체들에 대해 도민들이 품고 있던 악감정에 불을 질렀다.
해방정국 서북청년단의 모습
그러나 3월 들어 미군정의 입장이 상당히 유화적으로 바뀌면서 사태는 진정의 기미를 보이는 듯했다. 이 시기에 미군정은 5월 10일로 예정된 남한 지역 단독 선거를 성공적으로 치르는 데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한 주민과의 갈등과 충돌을 피하려고 했다. 이런 이유에서 미군정은 정치범에 대한 특별 사면까지 단행했다. 그렇지만 사태는 미군정이 바라는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았다. 남로당 지도부는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남한만의 선거를 막고자 했다. 본격적인 무장 투쟁의 길이 준비된 것이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의 중허리 오름마다 봉화가 타오르면서 남로당이 주도하는 봉기가 시작되었다. 봉기에 가담한 무장 대원의 수는 500~1,500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장대의 무기는 빈약한 편이었다. 무장대는 도내 24개의 경찰지서 가운데 11개를 일제히 공격했다. 경찰과 서북청년단 숙소, 우익 단체 간부들의 집도 습격했다. 이 때문에 도내의 행정과 치안은 순식간에 마비되었다. 선거 업무를 담당하는 면사무소와 선거 사무소가 연달아 습격당하면서, 다가오는 선거를 제대로 치르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섬 전체를 휩쓸었다.
심각한 사태에 직면한 미군정은 4월 5일에 제주도에 비상경비사령부(제주도 비상경비사령부는 1948년 4월 5일에 무장대 토벌을 위해 제주 경찰 감찰청 내에 조직된 경찰 기구였다. 이후 1948년 10월 11일에 창설된 제주도 경비사령부는 김상겸 대령이 사령관직을 맡았던 군대 조직이었다. 여순사건으로 김상겸 대령이 해임된 뒤에는 제9연대장 송요찬이 사령관을 겸직했다.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는 국회의원 재선거를 무사히 마무리짓기 위해 1949년 3월 2일에 조직된 군대 기구였다.)를 설치하고, 주민들의 통행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미군정은 육지의 여러 도에서 차출된 경찰 병력 1,700명을 제주도에 즉각 파견했고, 서북청년단도 대거 제주도로 향했다. 4.3 기간 동안 제주도에 들어온 서북청년단 단원은 적어도 800명을 넘었던 것으로 보인다. 4월 20일에는 제5연대 소속 1개 대대가 제9연대에 투입되었다.
미군정의 관심은 봉기의 원인과 배경을 확인하는 데 있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하나였다. 어떻게든 ‘빨갱이 섬’ 제주도의 반란을 조속하게 평정하는 것이었다. 제주도에서 일어난 불씨를 신속하게 끄는 데 실패한다면, 단독 선거는 물론 그 이후의 한반도 전체의 사정이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미군정의 기대와 달리, 토벌군의 주축인 제9연대의 지휘관 김익렬 중령은 초토화 작전보다는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력했다. 그의 노력에 힘입어 군과 무장대는 휴전에 합의했다. 그러나 불안한 휴전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중요한 변수는 미군정의 입장이었다. 미군정의 태도는 군정장관 딘(W. Dean) 소장이 제주도를 직접 다녀간 뒤 강경 일변도로 치달았다. 단독 선거를 눈앞에 둔 5월 5일, 미군정 고위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대책 회의에서는 무장대와의 협상을 통한 평화적 해결을 주장하던 김익렬과 강경 진압을 요구하던 조병옥 사이에 충돌이 일어난 뒤, 이튿날인 5월 6일 제9연대의 지휘관이 김익렬에서 강경파인 박진경 중령으로 교체되면서, 곧바로 위기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1948년 유격대장 김달삼(왼쪽)과 '4.28 평화협상'을 벌였던 김익렬 9연대장
1948년 5월 5일 제주비행장에 도착한 미군정 수뇌부. 이날 개최된 회의에서 조병옥 경무부장과 김익렬 9연대장 사이에 육탄전이 벌어졌다.
윌리엄 딘 소장. 4.3사건 당시 미군정장관이었으며 한국전쟁에서 24사단장으로 참전했으나 대전 전투에서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휴전 이후 송환되었다.
박진경 연대장(맨 오른쪽). 김익렬 후임으로 부임했으나 1948년 6월 18일 새벽에 부하들에게 암살당했다.
무장대는 5월 7일부터 선거 당일인 10일까지 선거 사무소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그들은 선거 관련 공무원들을 납치하고 선거인 명부를 탈취하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 그 결과 제주도의 전체 3개 선거구 가운데 두 곳에서 투표율 미달로 선거가 무효화되는 큰 일이 벌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사태가 곧바로 더 악화되지는 않았다. 토벌대와 무장대 사이에는 한동안 소강 상태가 유지되었다. 8월에 와서 불안한 평형 상태는 깨져버렸다. 8월 초에 김달삼을 비롯한 무장대 지도자들이 해주에서 열리는 인민 대표자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제주를 떠나자, 미군정은 이때야말로 제주도를 완전히 고립시켜 남한 정국의 안정을 꾀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때부터 미군정은 무장대의 투쟁과 제주도민의 항거가 북한과 연계된 체제 전복 음모라고 선전하기 시작했다.
8월 중순에 와서 무장대는 토벌 군경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다. 이에 대해 제주도 비상경비사령부는 8월 25일 최대의 토벌전이 펼쳐질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강력한 경고성 성명을 발표했다. 정부의 강경한 대응은 8월 15일에 미군정이 공식적으로 끝나고 남한 단독 정부가 출범하는 순간부터 이미 예고돼 있었다. 새롭게 출범한 정권은 제주도 지역 전체를 정권의 정통성에 도전하는 세력으로 인식했다. 10월 5일, 중앙 정부는 그동안 온건한 정책을 고집하던 제주도 출신의 제주 경찰청장을 정권의 구미에 맞는 강성 인물로 교체했다. 1월 11일에는 제주도 경비사령부가 설치되면서 병력이 증파되었다. 이로부터 다시 6일 뒤에는 제9연대장 명의로, 해안선에서 5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역과 산악 지역을 허가 없이 통행하는 것을 금지하며, 이 명령을 어기는 사람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총살에 처한다는 내용의 포고문이 나붙었다. 곧이어 10월 18일에는 해안이 봉쇄되었다.
5.10선거가 제주에서 보이코트된 후 제주 군정장관의 요청으로 제주 해안에 나타난 미구축함 크레이그호. 해안 봉쇄작전이 전개되었다.
토벌대의 조치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제주도 유일의 지역 언론사인 <제주신보> 사장과 전무가 체포되고, 편집국장은 총살되었다. 제주도에 주재 기자를 두고 있던 <경향신문>과 <서울신문> 지사장도 총살되었다. 이제 언론마저 토벌군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는 상황에 처한 것이었다. 이로써 제주도는 모든 면에서 완전히 고립되었다. 10월 말부터 11월 초 사이에는 제9연대 장병 100여 명이 군사 재판도 받지 못한 채 처형되었다. 처형된 군인들은 대부분 제주도 출신이었다.
군 내부에서 봉기에 협력한 자들을 처형 준비하는 모습
제주농업학교 천막수용소. 1948년 가을부터 제주 지역 기관장과 유지들도 대거 수용되었다.
11월 1일에는 제주도 경찰 당국이 경찰에 침투한 남로당 프락치를 색출했다고 발표했다. 제주 읍내에 거주하던 도청 공무원, 교육계와 언론계에 종사하던 대부분의 지식인이 제9연대 본부로 끌려가 감금당했고, 이 과정에 제주중학교 교장과 제주도청 총무국장, 재산관리처와 신한공사 직원들이 살해되었다. 제주 지검 검사를 포함해 법조계 인사들까지 죽음을 당했다. 이제 정부가 어떤 조치를 단행해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걸림돌은 완전히 제거된 셈이었다.
바로 이 즈음에 제주도의 상황을 악화시키는 중요한 사건이 육지에서 일어났다. 제주도 무장대 토벌의 임무를 띠고 출동하라는 명령을 받은 여수 주둔 제14연대가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를 일으킨 것이다. 10월 19일에 일어난 이른바 여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 관계자들에게 엄청난 위기 의식을 심어주었다. 처음에 크게 당황했던 이승만 정권은 차츰 이 위기를 오히려 정권을 강화하고 정국을 안정시키는 기회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집권에는 성공했지만 김구와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통일 운동 때문에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한데다, 9월 1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된 이후 최소한의지지 기반마저 붕괴될 수 있는 위기 상황에 처한 이승만 정권에게 여순 사건은 잘만 활용하면 호재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
이승만은 숙군(肅軍) 작업을 추진하면서 군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했고, 12월 1일에는 위기 상황을 이유로 국가보안법을 공포했다. 친일파 처단과 통일을 요구하는 세력 때문에 수세에 몰려 있던 이승만은 정국을 일거에 반공 정국으로 변화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이후 반대파에 대한 대대적 반격을 시도하면서 정권을 강화해나갔다. 바로 이런 일련의 흐름 속에서 1948년 11월 중순에 제주 지역 초토화 작전이 결정된 것이다. 이승만의 전략은 미국의 이해관계와도 부합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 역시 12월로 예정된 미군 철수 전에 제주도 문제를 빨리 매듭지어 한반도의 상황을 안정시키고자 했으므로 초토화 작전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초토화작전이 절정에 이르렀던 1948년 10월, 채병덕 육군참모총장 일행이 무장대 토벌을 담당했던 9연대를 격려하기 위해 방문했다.
초토화 작전은 11월 중순부터 이듬해 3월까지 약 5개월간 계속되었다. 1948년 11월 13일 새벽 2시, 제주도의 중산간 마을 가운데 하나인 조천면 교래리를 포위하면서 시작된 작전은 엄청난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낳았다. 작전 지역 내에 있던 169개 마을 가운데 130개가 불에 타버렸고, 3만 명 이상의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토벌대는 중산간 마을 주민들이 무장대에게 식량과 은신처를 제공하고 있다고 가정하고 있었다. 이런 가정은 토벌대가 무장대에게 기습당할 경우 확신으로 바뀌었고, 따라서 토벌대는 마을 주민을 남녀노소, 무장 여부를 막론하고 살해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무차별 학살을 피해 추운 겨울에 깊은 산중으로 들어간 중산간 마을 주민들은, 굶어 죽거나 무장대의 일원으로 간주되어 살해당했다. 토벌대의 소개 명령에 따라 해변 마을로 내려온 사람들도 학살의 위협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토벌대는 가족 중에 한 사람이라도 빠져 있는 경우에는, 특히 젊은이가 빠져 있는 경우에는 ‘도피자 가족’이라고 확신해서 그 가족 모두를 처형했기 때문이다.
제주에서 체포된 무장대원의 모습(1948.5)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사진이며,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수록된 사진을 찍었다.
중산간 지역으로 피신한 주민들
학살에는 뚜렷한 원칙이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단 토벌대의 명령과 요구에 응해야 했지만, 그렇게 했다고 해서 꼭 살아남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제주도에서 전개된 초토화 작전은 책임 의식과 규율이 없는 집단에게 총과 권력이 주어졌을 경우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비극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너무도 잘 보여주었다. 규율이 결여된 군경과 복수심에 찬 서북청년회 단원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절대 권력’을 공사의 구분 없이 행사하면서, 사태를 걷잡을 수 없이 악화시켰다. 여성에 대한 강간, 유희적인 살인, 무자비한 참수 같은, 인도에 반하는 행위 가운데서도 특히 극악한 유형의 범죄가 도처에서 일어났다. 무장대 일원으로 활동한 사람이나 산속으로 도주한 사람을 체포하지 못할 경우에 그 가족을 대신 살해하는 경우도 곳곳에서 저질러졌다. 이처럼 전근대적인 범죄는 따로 예시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일어났다.
4.3을 소재로 그려진 강요배의 그림. 제목 '겁간'
초토화 작전 기간 중에서 학살이 정점을 이루었던 시기는 1948년 12월 중순부터 열흘간이었다. 경비사령부의 지휘부가 1948년 말까지 제주도 주둔 토벌대를 기존의 제9연대(연대장 송요찬)에서 여수 14연대 반란 진압에 성공한 제2연대(연대장 함병선)로 교체한다는 계획을 확정한 이후, 제9연대 지휘관들이 부대 교체에 앞서 괄목할 만한 전과를 올려야 한다는 부담감 속에서 마지막 토벌 작전에 혼신의 힘을 쏟았기 때문이었다.
12월 29일에 제9연대와 임무를 교대한 제2연대는 잠시 준비 기간을 가진 뒤 다음 해 1월 4일부터 토벌 작전을 시작했고, 2월 4일에는 육해공군이 모두 동원된 합동 작전이 펼쳐졌다. 이미 한겨울이 닥친데다 중산간 마을이 토벌군에 의해 거의 모두 불타버려서 무장대는 보급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무장대는 제2연대가 아직 제주도 지리에 익숙하지 못한 상태임을 노려 대대적인 기습을 감행했다. 무장대의 기습 공격을 받은 제2연대는, 무장대가 퇴각한 후에 인근 지역 주민들에게 대규모의 보복 학살을 저질렀다. 1월 17일에는 해안 마을인 조천면 북촌리에서 400명 이상의 인명이 희생되는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1949년 3월 2일에는 제주도 지구 전투사령부(사령관 유재흥)가 설치되어 마지막 토벌 작전이 이루어졌다. 때 맞춰 이범석 총리가 제주도를 방문해 정부의 선무공작 방침을 밝히면서, 무장대와 대피해 있던 주민들에게 귀순을 권유했다. 하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마지막까지 버티던 무장대는 급속도로 와해되었다. 무장대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던 이덕구가 살해되면서 무장 투쟁은 사실상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1949년 군과 경찰의 선무공작에 의해 산 속에 숨어 있다 하산한 제주도민들
십자가에 매달린 한라산 유격대장 이덕구(왼쪽), 오른쪽은 학생시절 사진이다.
물론 제주도의 비극이 이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다음 해 6월 25일에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학살의 악몽이 다시 제주도를 엄습했다. 전쟁이 발발한 직후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사람들과 ‘통비(通匪) 가족’으로 낙인찍혀 있던 사람들이 예비 검속되어 학살당햇던 것이다. 4.3과 관련되어 육지의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도 학살의 희생자가 되었다. 한라산 일대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했던 무장대는 전쟁 중에 창설된 제100전투경찰사령부와 유격전 특수 부대인 무지개 부대의 소탕 작전으로 궤멸되고 말았다. 한국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제주도에서의 토벌은 실질적으로 마무리되었고, 1957년에 마지막 무장대원인 오원권이 체포됨으로써 지난 10년 동안 엄청난 희생을 가져왔던 저항과 진압, 그리고 학살은 모두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