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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추사체(秋史體) 성립(成立)(4)

제주농부 2017. 7. 9. 11:15
그래서 조선서예계를 이와같이 망친 것은 근래 명필로 꼽히던 원교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잘못된 가르침인 <원교필결(員嶠筆訣)>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에 대한 신랄한 공격을 퍼붓는데 <서원교필결후(書員嶠筆訣後)>에서는 그 잘못의 하나하나를 지적하여 구체적으로 논박한다. 이 논박 속에는 억지와 생트집이라고 보아야 할 부분도 상당히 많다.

(원교 이광사 : 서결)

벌써 원교 자신이 청조고증학의 성과를 어느 정도 접해 비학의 중요성을 이미 인식하고 한위 고비 임서의 중요성을 역설함으로써 비학의 선구를 이루고 있는데도 이를 거의 인정치 않으려 하거나 원교가 현완번(懸腕法)도 모르고 언필(偃筆)을 꾸짖었다고 하는 등의 사실들이 이에 해당한다. 아마 추사 자신이 조부로부터 배운 동국진체가 중국의 석학들에게 고루무법한 것으로 무참히 부정당하자 그에 대한 자괴감이 그로 하여금 원교에게 정도 이상의 분풀이를 하도록 만들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추사로 하여금 옹, 완 이사(二師)의 서론을 한 번 듣고 깨우치게 한 바탕은 역시 <원교필결>이었고 동국진체의 철저한 수련이었다던 것을 추사는 깨달았어야 한다. 추사체가 그것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사실이 후학의 눈에는 확연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아마 추사도 어느날 문득 깨달았을 것이다.

어떨든 추사는 연경에 갔다온 이후부터는 주로 옹방강의 서론에 입각해 그의 서법을 익히는 것으로 서예수련을 다시 시작했던 듯하다. 그래서 그가 31세 때 쓴 <이위정기(以威亭記)>를 보면 옹방강 해서 글씨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데 당정한 풍미는 그 조부 글씨의 특징을 보는 듯하여 벌써 추사다운 면목이 드러난다. 33세 때 쓴 <상촌선생비각기사(桑寸先生碑閣記事)>와 <가야산해인사중건상량문(伽倻山海仁寺重建上樑文)>도 이와 큰 차이는 없다.

(추사 김정희 : 이위정기)

37세 때 생가 아버지 김노경이 동지정사가 되어 둘째 아우 김명희(金命喜, 1788~1857)를 자제군관으로 대동해 가는 편에 청유(淸儒) 고순(顧?, 1765~1832)에게 써 보낸 직성유궐하, 수구만천동(直聲留闕下, 秀句滿天東, 곧은 소리는 대궐 아래 머무르고, 빼어난 구점은 하늘 동쪽에 가득하다.)은 아직 비후미(肥厚美, 살찌고 두터운 맛)가 크게 남아 옹방강의 필의가 엿보이나 이미 예기(隸氣, 에서의 기미)가 횡일(橫溢, 마구 넘처남)하여 추사체의 진면목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이 때 추사는 진용광(陳用光, 1768~1835)에게도 영련(楹聯)과 시첩을 서 보내는데 이 글씨도 이와같은 필치를 보였으리라 생각된다.

다음 38세 되는 해 가을에 쓴 <허천소초발(虛川小草跋)>의 소해필체 역시 이와 같으니 벌써 추사는 30대 후반에 추사체의 골격을 이룩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실로 옹,완 이사로부터 새로운 서론을 들은지 10여 년만에 이룩한 장거(壯擧)였다.

이에 청나라 서예계는 큰 충격을 받았던 듯하니 비파서(碑派書)의 창시자로 첩학무용론을 주장해 급진비학파의 문호를 개설한 등석여의 아들 등상새(鄧尙璽,후에 전밀(傳密)로 개명(改名) 1796~1863)가 사신으로 간 추사의 부친 유당 김노경에게 그 선부(先父, 돌아간 아버지) 등석여의 행장과 필적을 내보이면서 묘지명 찬술을 부탁하고 있는 것으로 그 대강을 짐작할 수 있다. 아마 비파서의 이상이 추사에게서 구현되고 있음을 실감했기 때문에 등상새는 그 선부의 묘지명이 추사의 부친 손에 지어지고 추사의 글씨로 써지기를 바랐었던 모양이다.

(청 등석여 : 전서)

유당(추사 선생 생부)은 결국 환로에 급급하느라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지만 이때부터 맺어진 친교가 등석여의 글씨를 추사에게 보내고 등상새가 추사의 글씨를 간절히 요구하는 관계로까지 발전한다. 이렇게 등문과의 학연이 이루어져서 마침내 등석여의 제자로 등상새를 양육한 이조락(李兆洛)과도 서신을 교환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되어 추사는 등파의 급진적인 비학이론과 서법까지도 수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추사는 청조고증학의 난만한 발전 결과로 출현한 서예금석학 즉 비학의 제파 이론을 겸수하고 그 이론을 그의 타고난 예술적 천품으로 서예에 구현해내니 이것이 이른바 추사체다. 그러므로 추사체는 비파서학이 추구하던 이상적인 경지를 이룩한 비파서의 결정체라 해야 할 것이다.(계속)
출처 : 상촌김자수기념사업회& 추사김정희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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