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청에서는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고증학의 발전 결과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題要)>의 편찬(1773~1782)으로 전기 고증학이 일단 정리되는 건륭(1736~1795)후반기로부터 당시 연경학계의 태두로 문호가 극성하던 옹방강이 학예일치를 주장하고 비문의 서체연구를 통해 예술성을 재발견하려는 비학운동을 활발하게 진행시킨다. 그래서 종래 왕희지법첩을 비롯한 필첩 위주의 서학을 보충해야 한다는 새로운 서론을 제시하면서 자신이 이를 실천으로 증명해 보이고 있다.
사실 이 당시는 왕희지시대로부터 이미 1400여년이 경과하고 있어 <지천년 견오백년(紙千年絹五百年, 종이는 천년이고 비단은 5백년)>이라는 재질의 수명한계 때문에 왕희지 진적은 물론 초당 삼대가를 비롯한 당 이전의 진적도 실존하기 어려운 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필첩을 조본으로 서법수련을 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이 원형을 상실한 전모본(轉摹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진기술이 발달해 있지 않던 당시의 사정으로 전사(轉寫)의 방법은 오직 영탑(影榻, 반투명의 기름먹인 종이를 원본 위에 놓고 빛을 비춰 모양을 본떠 냄)에 의존하는 것인데 그 과정에서 기운이 빠지는 것은 고사하고 원형조차 변개되는 것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석은 세워지던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므로 왕희지시대 뿐만 아니라 그 이전 진한 시대의 원적도 직접 접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이에 법첩의 원형을 이 비탁(碑拓)으로 복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의 중요성을 역설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비학연구를 진행해가다 보니 왕희지 절대론이란 것 자체에 회의를 느끼게 되고 왕희지체의 근원을 이루는 한예(漢隸) 즉 팔분서(八分書)의 예술성이 가장 탁월하다는 사실도 알아내게 된다. 이에 옹방강은 서예수련의 마지막 단계를 한예에 두고 그의 소급 통달을 주장한다. 이는 첩학 자체를 부정하는 논리는 아니다. 오히려 전통적인 첩학을 바탕으로 비학을 포섭 겸수하려는 온건개혁론적인 입장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안휘성(安徽省) 회령(懷寧) 출신의 포의(布衣, 벼슬하지 않은 선비) 등석여(鄧石如, 1743~1805)가 나와서 진전한예(秦篆漢隸)만이 서법의 준칙이라는 비학절대론을 부르짖고 첩학의 전통을 부정하려는 급진적인 행동을 보인다. 옹방강은 급진론이 가져오는 위험성을 경계하여 조문식(曺文植, ?~1798), 유용(劉墉, 1719~1804), 육석웅(陸錫熊, ?~1792) 등 첩학파에 속하는 전배들의 비호 아래 연경에 진출해 온 등석여를 일문의 막강한 힘을 이용해 쫓아버린다.
그러나 후배학자로 옹방강 자신과도 교유가 깊었고 경학과 금석학에 정통해 장차 청조고증학계를 대표할 완원(1764~1849)이 뜻밖에 <남북서파론(南北書派論)>과 <북비남첩론(北碑南帖論)>을 저술해 등석여의 급진개혁설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한다. 이에 등석여의 비학절대설은 그 제자인 포세신(包世臣, 1775~1855)에 의해서 이론 정립을 보게 된다.
이렇게 중국 서학계가 왕희지 이후 처음 맞는 소용돌이 속으로 막 휘말려들고 있을 때 추사는 연경에 갔던 것이다. 그리고 옹방강과 완원을 만나 사제지의를 맺고 돌아온다. 이때 이미 추사는 완원에게 <남북서파론>과 <북비남첩론>의 개요를 듣고 왔을 것이다. 이 저술들은 추사가 완원을 만난 4년뒤에 완원이 옹방강의 제자인 매계(梅溪) 전영(錢泳, 1759~1824)에게 내보였다 하니 그 생각들은 추사와 만나고 있을 때 벌써 정리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옹방강으로부터는 그의 비첩겸수론을 자세히 지도받고 왔었다. 그래서 추사는 <박혜백(朴蕙百) 계첨(癸詹)이 글씨를 묻는 것에 답함>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글씨에 뜻을 두었었는데, 24세에 연경에 가서 여러 이름난 큰 선비들을 뵙고 그 서론을 들으니 발등법(撥?法)이 입문하는데 있어 제일 첫째가는 의미가 된다고 하더군. 손가락 쓰는법, 붓 쓰는 법, 먹 쓰는 법으로부터 줄을 나누고 자리를 잡는 것 및 삐침과 점획치는 법에 이르기까지 우리 동쪽나라 사람들이 익히던 바와는 크게 달랐었네. 그리고 한위 아래 금석문자가 수천종이 되니 종요(鍾繇, 151~230), 삭정(索靖, 239~303)으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반드시 북비(北碑)를 많이 보아야 한다고 하더군. 그래서 비로서 나는 그 처음부터 변천되어 내려온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네>
이렇듯 추사는 옹, 완 이사(二師)의 참신한 서학이론에 크게 감명을 받고 서예금석학에 바탕을 둔 서예수련만이 자신이 가야할 길이라는 것을 확연히 깨닫는다. 그리고 이제까지 자신만만했던 자가서법의 무법고루함에 통렬한 자괴감을 느낀다.(계속)
출처 : 상촌김자수기념사업회& 추사김정희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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