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도 사정은 비슷하다. 통일신라문화 극성기와 고려문화 극성기에 귀족적 취향과 함께 유행하던 왕희지체는 원지배시대 이후 만권당(萬卷堂)에서 조맹부의 영향아래 중국문화를 직수입하면서부터 송설체로 직접 바꾸어 가는데 이 만권당에서 길러진 신진 성리학자 계열들이 장차 조선을 건국하자 조선은 처음부터 송설체 일색으로 출발하게 된다.

(조맹부 삼문기)
그러나 연미화려(姸媚華麗, 아리땁고 화려함)한 송설체가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에 이르면 강경(剛硬)한 조선의 기질과 근엄(謹嚴)한 사대부체 및 북송 왕저(王著)의 위작(僞作)이라는 <악의론(樂毅論)>, <황정경(黃庭經)>, <효녀조아비(孝女曹娥碑)> 등 해정단아(楷正端雅)한 송대 왕희지체의 영향을 다시 받아 근엄(謹嚴) 단정하고 강경박실(剛硬樸實, 굳세고 질박하며 충실함)한 석봉체(石峰體)로 변화한다. 이 글씨체는 이후 백여년간 사대부들 사이에 크게 애호되어 시체(時體)를 이루지만 곧 조선 성리학을 사상적 근거로 하는 진경문화운동이 전개되면서 다시 왕희지체로 돌아갈 것을 표방하고 나온 동국진체(東國眞體)에 자리를 양보한다.

(왕희비 황정외경)
동국진체는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의 이복형인 옥동(玉洞) 이서(李?, 1662~1723)가 당시 조선에 횡행하던 <악의론(樂毅論)>, <유교경(遺敎經)>. <황정경(黃庭經)> 드 왕희지 법첩을 조첩(祖帖)으로 하고 북송 미불(米?)의 필체를 부분적으로 수용해 들인 필체였다.

(석봉 한호 : 등왕각시서)
이 글씨체를 백하(白下) 윤순(尹淳, 1680~1740)을 거쳐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에 이르러 완성을 보게 되는데, 백하는 미법의 토대 아래 명(明) 문징명(文徵明, 1470~1559)의 필법을 수용해 갔기 때문에 필체는 진경문화 절정기의 특징에 알맞은 전아유려(典雅流麗)한 모습을 보인다. 아를 당시에는 동국진체라고도 하고 진체(晋體)라고도 불렀으니, 진체는 송설체를 촉체(蜀體)라 하는 것과 대구(對句)로 일컫던 말이다.
이런 시류 속에서 추사 가문도 그 증조인 월성위 김한신(金漢藎, 1720~1758)은 송설체와 석봉체를 잘 썼었고 그 조부인 김이주(金?柱, 1730~1797)는 진체 즉 동국진체를 잘 썼었는데 김이주의 글씨체는 영조의 어필체와 방불하다. 따라서 그 조부로부터 비롯됐을 추사 글시 교육의 기초는 동국진체였다고 할 수 있다. 추사 초년 글씨에서 보이는 단정한 결구와 전아한 운필법은 여기서 연유한 것이다.(계속)
출처 : 상촌김자수기념사업회& 추사김정희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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